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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20-21주일 (2회분)

따뜻함을 지닌 믿음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온 세계에 칙령을 내려 호적 등록을 하게 했다. 이 첫번째
호적 등록은 퀴리노가 시리아를 통치할 때 실시되었다. 모두들 본관고을로 등록하러갔다.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다윗의 고을로 올라갔는데, 베들레햄
이라는 곳이었다. 요셉이 다윗 가문의 일족에 속했기 때문이다. 요셉은 정혼한 마리아와 함
께 등록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거기 머무는 동안 해산할 날이 차서 첫 아들
을 낳아,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누이었다. 방에는 들어갈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루카 2,1-7).


성모 마리아는 예수 아기를 방이 아니라 마구간에서 낳았다.
해산을 앞둔 마리아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남편 요셉의 고향 베들레헴에 가서 호적 등록을
해야 했는데, 베들레헴에서 여관방을 구하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마구간에서 몸을 풀어야
했던 것이다. 아기를 방이 아닌 마구간에서 낳아 구유에 눕혔다는 것은 마리아와 요셉이
처한 가난하고 옹색한 처지를 대변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옹색한 처지에서 갓난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혔다.

'아기를 낳아 포대기에 싸서 눕혔다'는 말은 평범한 표현같지만, 숨겨진 뜻이 있다.
구약성서에 보면 포대기에 싸 준다는 것은 보살핌과 친절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태어났을 때 '포대기로 싸줄 사람도 없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곧 바로 '동정심을 베풀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16,4-5).

그렇다면 마리아가 예수 아기를 포대기로 싸서 구유에 눕혔다는 말은 어머니의 사랑과 친절
로 아이를 돌보았다는 뜻이다. 마리아는 어쩔 수 없이 가난하고 옹색한 처지에서 아기를
낳았지만,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으로 아기르 보살폈던 것이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과정에서 닥치는 어려움 중에서도 정성껏 예수 아기를 돌보
면서 최선을 다한다. 여기서 성모 마리아의 따뜻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성모 마리아의 따뜻한 마음은 요한 복음 2장에 전하는 카나에서의 혼인잔치에서도 드러난다.
예수와 그 제자들, 예수의 어머니가 어느 잔칫집에 초대를 받았는데,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 난감한 사실을 눈치챈 마리아는 아들 예수께 다가가서 도움을 부탁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저더러 어쩌라고요?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라고 대답하신다.
하지만 마리아는 아들의 이해할 수 없는 대답, 어쩌면 거절로 여겨지는 듯한 반응에도
실망하지 않고 굳건한 신뢰로써 하인들에게 부탁한다. "무엇이든지 이르시는대로 하게."
예수께서 그 집에 있는 여섯개의 큰 항아리에 물을 채우게 하시고,
그 물을 퍼다 잔치 주관자에 가져다주라고 명하시는데, 하인들이 물을 퍼갔을 때에는
이미 물이 포도주로 변해 있었다.

이렇게 해서 곤경에 처한 잔칫집 주인이 성모 마리아의 간청에 힘입어 예수께로부터 도움을
받게 된다. 여기서 성모 마리아는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면서 연민을 갖고
이들을 도와주려고 애쓰는 분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이런 마리아의 모습을 보면서 성 암브로시오(†397)의 말씀을 되새기게 된다.
"인간은 성덕과 은총을 더 많이 입을수록 더 크게 공동체를 향해 열린다."

사랑의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사람에게서 사랑의 온기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1요한
4,21)고 말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진 것이 많지 않다", "바쁘다", "사는 형편이
좀 나아지면 돕겠다"는 등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를 대면서 사랑의 실천을 멀리한다.

사실 가진 것이 남보다 많지 않아도 얼마든지 이웃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밀 수 있다.
어느 신문에 사회적으로 약자를 위해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절반 이상이 사회적 빈곤층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그 기사를 뒷받침해 주는 실화를 소개한다.

일 년 전 겨울, 군 입대 영장을 받고서 의기소침해 있던 나는 매일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지
냈다. 그날도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다가 자정쯤이 되어서야 헤어졌다.
하지만 난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 혼자 거리를 배회했다.
한참을 어슬렁거리다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어져서 우동 가게에 들어갔다.
새벽인데도 우동 가게 안은 야간 쇼핑을 즐기는 젊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우동을 시키고 기다리는데 지저분한 점퍼에 얼룩진 가방을 맨 어떤 아저씨가 들어왔다.
식당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굶어서 그러는데 우동 국물 좀 먹을 수 있을까요?" 주눅든 목소리,
옆의 한 아가씨는 들릴 정도로 짜증을 낸다. "뭐야 정말, 밥맛 떨어지게…."
머쓱하게 서 있던 그 아저씨에게 말을 건넨 사람은 주인 아줌마였다.
"이리 앉으세요. 드릴께요."

그리고 잠시 후 아저씨의 테이블에 놓인 것은 우동 국물이 아니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볶음
밥이었다. 그 아저씨의 손가락이 잠시 떨리던 것을 나는 보았다. 아저씨가 식사를 다하고
나가려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재빨리 나오더니 아저씨 손에 지폐 한 장을 쥐어주었다.
"힘내세요." 아저씨는 아무 말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갔다.
아주머니는 조금 전까지 물가가 올라도 너무 오른다며 한숨을 쉬던 분이었다….
우동 가게를 나오자 추운 바람은 여전했으나 난 춥지도 슬프지도 않았다(장재호 월간「리더스
다이제스트」2001년7월호에서).

물가고에 시달리며 힘겹게 살아가는 우동집 아주머니의 작은 친절이 인생 막장에 있는 한
노숙자에게 힘을 주었다. 아울러 입대를 앞두고 의기소침해 있던 한 청년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이런 일은 어쩌다 한 번 이쓴 것이겠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사회 도처에 숨어 있다.
창세기에 보면 야훼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하
지 않겠다고 말씀하셨고(창세 18,32), 결국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열 명이 없어 멸망했다.
이 논리를 우리 사회에 적용시켜보자. 우리 사회는 갈수록 인성(人性)은 황폐해지고
부조리가 판을 치는 사회, 소돔과 고모라 버금가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멸망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아직도 의 인 열 명이 어딘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세상이 죄악에 찌든 것 같지만 그래도 유지되는 것은
여기저기에서 보이지 않게 사랑을 베풀면서 성실하게 사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툭하면 '나롸와 국민을 위하여'라는 명분을 앞세우면서 사실은 자신의 이익을 좇는 유명
인사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세상 한구석에서 따뜻함을 베풀며 사는 이들이 이 세상을
지탱해 주는 기둥이라고 하겠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이 일어나도록 중개하신 성모님의 모습에
근거해서 천주교 신자들은 성모 마리아에게 중개의 기도를 부탁한다.
적지 않은 개신교 신자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다 못해서 우상 숭배라고 비난한다.
물론 일부 가톨릭 신자들이 성모 마리아를 마치 하느님처럼 여기면서 공경하는 것이
이런 비난에 빌미를 제공한다. 이런 잘못된 태도는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점은, 가톨릭 교회가 성모 마리아에게 중개의 기도를 요청한다
고 해서 성모 마리아가 무슨 신적인 능력이 있어서 직접 도와주기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모 마리아에게, 우리를 위하여 아들 예수께 간청해 달라고 부탁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중세의 신학자 둔스 스코투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성모 마리아는 "기도로써 중개하는 권위를 지니고 있지, 하느님께 명령하는 권위를 지닌 것
이 아니다."
성모 마리아에게 중개의 기도를 요청하는 것은 '성인들의 통공'이라는 가톨릭 교회의 오랜
신앙 전통에 근거한다. 가톨릭 교회는 이미 세상의 삶을 마치고 천상에서 하느님과 함께 영
광을 누리고 있는 분들이 아직 지상에 있는 이들을 위해서 하느님께 중개의 기도를 바친다는
것을 확신해 왔다. 이런 '성인들의 통공'은 《사도신경》에도 들어 있는 내용이다.
성모 마리아에게 중개의 기도를 청하는 것은 바로 이런 '성인들의 통공'이라는 맥락 안에서
이루어진다.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에게.
특히 자신보다 성덕이 높고 신앙이 깊은 사람에게 기도를 부탁한다.
예를 들어서 천주교 신자들은 신부님이나 수녀님에게, 개신교 신자들은 목사님에게,
불교 신자들은 스님에게 기도를 청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평범한 인간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를 바쳐 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예수의 어머니이면서 누구보다도 훌륭한 믿음을 지녔던 '비범한' 인간인 성모 마리아가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중개의 기도를 드려 준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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